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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이디 그레이(Lady Grey)와 함께 하는 한밤중의 티타임
    My Soul Food 2021. 1. 3. 19:22

     

    내 열일곱살 생일 선물은 여러 브랜드의 티백을 모은 티샘플러였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밤 늦게까지 야간자율학습, 일명 야자를 하면서 졸지 않기 위해 적당히 카페인이 들어가 있으면서, 맛있고, 따뜻하게 마실 수 있는 것을 찾던 나는 남들과는 조금 다르게 홍차에 정착했다. 내 첫 홍차는 그 티 샘플러에 들은 트와이닝(Twinings)사의 레이디 그레이(Lady Grey)’였다.

     

    상자 속 파란색 매끈한 종이 포장에 싸여 있는 레이디 그레이 티백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집에서 주전자를 이용해 처음으로 끓인 첫 홍차의 맛은 물을 지나치게 많이 넣어서 밍숭맹숭했지만 포장지에 남은 은은한 시트러스와 홍차향이 맘에 들어 한동안 포장지를 버리지 않고 책상위에 올려둔 채로 킁킁거리며 잔향을 맡았던 기억이 난다. 아껴 마시던 티 샘플러의 티백을 다 마셨을 때, 어머니가 마트에서 사왔다며 100그램짜리 틴에 들은 레이디 그레이 잎차를 사오셨다. 고등학생의 용돈을 쪼개서 어떻게 홍차를 사 마실까 골몰하던 다는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선물에 기뻐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파란색 정육면체의 매끈한 틴케이스는 홍차라는 이상한 나라로 나를 이끌어줄 시계토끼처럼 보였다.

     

    집에서 홍차를 마시는 사람은 나 밖에 없었기 때문에 100그람이 넘는 홍차는 몇 달은 마실 수 있는 분량이었다. 이때부터 나는 거름망이 있는 텀블러를 갖고 다니며 야자시간마다 홍차를 마시기 시작했고, 야자시간마다 한밤중에 티타임이 열렸다. 대부분은 교실에서 혼자 공부를 하며 마시는 티타임이었지만 때로는 친구들과 함께 나눠 마시기도 했고, 가끔은 저녁시간에 마트에서 사온 주전부리들과 함께 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학교 교정 벤치에서, 이런저런 핑계로 야자를 땡땡이치고 과학실에서 레이디 그레이를 마셨다.

     

    레이디 그레이로 홍차의 세계에 입문한 나는 그 이후로 다양한 홍차들을 마시기 시작했고. 대학에 들어가서는 홍차 외에도 다양한 차들을 마시게 되었다. 나는 책장 한 칸을 홍차가 담긴 틴케이스와 티백, 주변에서 소분받은 지퍼백들로 가득 채우고 산다. 해외로 나갈일 있을 때마다 면세점에서 홍차를 검색하고, 블랙프라이데이 대신 박싱데이의 차 브랜드들 세일을 기다리며 산다. 열일곱살에 선물 받은 파란색 티백은 나의 취향을 바꿔놓았다. 까만 찻잎 사이로 보이는 오랜지 필링과 다홍빛 수색, 티백을 넣으면 제일 먼저 올라오는 시트러스향과 그 다음 올라오는 홍차향, 달큰함을 남기고 사라지는 끝 맛과 잔향. 고등학교 3년동 야자와 홍차는 늘 함께였고, 다른 차를 마시다가도 레이디 그레이는 고등학교 시절처럼 문득문득 떠오른다.

     

    그림 1   현재는 단종된 리뉴얼 되기 전 레이디 그레이 틴케이스

     

     

     

     

                                                                                                                             Editor 두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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